우정의 무대 뽀빠이 이상용 근황 - 그의 인생을 응원하며
우정의 무대 뽀빠이 이상용 근황 - 그의 인생을 응원하며
이상용은 '뽀빠이'라는 닉네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상용은 요즘 어린 친구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벌써 70세가 훌쩍 넘은 나이다. 어느정도 이해도 간다. 하지만 '우정의 무대'를 본 세대라면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연예인 이상의 연예인
내가 뽀빠이 이상용을 좋아하는 이유는 연예인 이상의 연예인 이었다. 연예인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센스, 진행능력, 공감능력 을 갖추었다. '우정의 무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문성격이 강한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여자 아이돌이 위문 공연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동없이 군인들의 즐거움으로 채워 진다. 하지만 '우정의 무대'는 달랐다. 뽀빠이 이상용은 군인들과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웃음, 진행을 할 수 있었다.
가장 화제가 됐던 코너는 '그리운 어머니'다. "우리 어머니가 확일합니다!" 를 외치며 군인들이 어머니를 만날 때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시청자는 없을 것이다. 위문 공연을 전국민적인 인기를 끄는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은 이상용의 역할이 컸다. 그 증거로 이상용의 '공금횡령 누명 사건'을 겪은 뒤로 하차하고 차기 MC 로 김병조가 진행을 맡았지만 이전 만큼 인기를 끌지 못하고 프로그램은 막을 내렸다.
이상용은 그 외에도 여러가지 선행을 했다. 연예인이 선행을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선행을 하는 연예인은 본 받아 마땅하다. 당시에 여러가지 사회 봉사는 물론 심장병 어린이 치료를 위한 기금을 모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항상 긍정적인 말과 표정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힘이 됐다.
공금횡령 누명 사건
뽀빠이 이상용이 방송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은 1996년 이다.
1996년 11월 이상용은 심장병 어린이 수술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추척60분 보도 등으로 사건이 알려 지면서 오랜기간 MC를 보았던 우정의 무대 진행도 그만 두었다.
결과적으로 1997년 2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에서는 혐의점을 찾을 수 없어 기소도 하지 않았다. 무혐의로 풀려 났다.
이에 대해 이상용 본인은 정치보복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상용은 사건 이후 다시 방송으로 재기 하는게 쉽지 않았다. 모든 방송에서 퇴출 되었다.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으로 떠나 가이드 생활을 하며 버텼다고 한다. 가족이 그리고 한국으로 왔지만 일할 곳이 없어 비닐 하우스 등에서 일용직을 하며 버텼다고 한다.
사건 이후 근황
힘든 시간을 버티고 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알려졌다. 이상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찾았다. 강의 섭외가 들어 왔다. 그가 겪은 인생의 굴곡을 재미있게 풀어 낸다.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이상용의 강의를 들으며 위로를 받는다. 지금의 그를 만든것이 지난 날의 고난 때문이라니 아이러니 하다. 하지만 잘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최근에는 각종 강연을 다니며 희망과 행복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기사 쓴 기자들은 사과를 해야 한다. (절대 하지 않겠지만). 의혹이 불거질 때는 모든 언론이 앞다퉈 보도 했었다. 하지만 무혐의가 되니 언론은 관심이 없었다.
우리 국민들도 반성해야 한다. 욕은 잘한다. 하지만 사과할 줄 모른다. 언론이 보도를 하지 않아서 아직도 그를 범죄자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적어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를 죄가 없는 사람으로 인식해야 한다. 간혹 '그래도 뭐가 있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상용 본인은 이제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난다. 진실앞에서 들은 척도 안하는 모습이 슬프게 다가 오는 저녁이다.